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랜드 공국 (문단 편집) === 개국과 시련의 시기 (1967 - 1978) === [include(틀:시랜드 공국의 대외전쟁)] 그러던 중, 1967년 9월 2일[* 시랜드 공비이자 패디 로이 베이츠 공작의 부인인 조안 베이츠 공비의 생일이다.] [[영국 육군]] 예비역 [[소령]]이자 해적방송의 운영자였던 패디 로이 베이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몬테카시노 전투]]와 북아프리카에서 종군하였다.]가 이 해상 구조물의 가치를 재발견했다. 패디 로이 베이츠는 전역 후 수산업에 종사하다가, 영국 근해에 버려진 해상 구조물에서 해적방송을 하다 무선전신법(Wireless Telegraphy Act 1949) 위반 혐의로 벌금을 먹었다. 그러다 당시 영국의 영해 밖[* 당시 국제법상 영해는 육지에서 3해리 안이었다.]에 존재하고 있던 이 요새의 가치를 재발견하고는 장비를 옮겼지만, 다시는 방송을 재개하지 않았다. 1967년 8월 14일, 특정 해양 구조물, 즉 베이츠와 같은 플랫폼에서의 방송을 금지하는 해양 방송법(Marine Broadcasting Offences Act of 1967)이 발효되자 19일 후인 9월 2일, 베이츠는 아들 마이클 베이츠[* 당시 14세, 1대 패디 로이 베이츠 공작의 사후 공위를 계승했다. 現 시랜드 공.], 딸 퍼넬러피, 몇몇 친구들과 함께 독립선언을 발표하여 요새는 시랜드라고 이름짓고, 자신도 로이 베이츠 공이라고 명명하였다. 영국은 일단 [[영국 해군|왕립해군]]을 파견했다.[* 영어 위키피디아의 Paddy Roy Bates 항목에는 이 때 습격한 것이 왕립해군이 아니라 또다른 해적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캐롤라인의 로난 오라힐리(Ronan O'Rahilly) 일파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베이츠 일가가 총을 쏘며 격렬히 저항해 퇴거시키지 못했다. 그 뒤 영국 정부는 재판을 걸었지만, 1968년 11월 25일에 나온 판결에 의하면 시랜드 공국은 영국의 [[영해]] 밖에 존재했고, 주변국들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영국의 사법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첨언하자면 이 당시에는 국제적으로 육지로부터 3해리 내의 바다밖에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랜드 공국이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2년부터 영해의 범위는 해안으로부터 12해리이며, 이 기준을 따르면 시랜드 공국의 국토는 영국의 영해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시랜드 공국도 영해 확장을 천명했는데, 이에 대해 영국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영국이 시랜드 공국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지지자들이 있다. [youtube(bYQphX0zPSc)] 영국 British Pathe에 소개된 시랜드 공국, 1969년 이후 공국은 순조롭게 발전하여 1975년에는 국장과 국가, 통화제도와 [[여권]]까지 만들면서 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1978년에는 여기에 사업 관련으로 방문한 [[네덜란드]]와 [[서독]]인들이[* 이 중 한 네덜란드인은 시랜드 공국의 총리직을 맡고 있었다.] 패디 로이 베이츠 공작과 조안 베이츠 공비가 영국에 거주하는 동안 헬리콥터, 제트스키, 모터 보트 등을 이용하여 섬을 공격, 패디 로이 베이츠 공작의 공자들을 인질로 잡아 이 섬을 무단으로 탈취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외자(外者)의 난이라고 한다. 허나 로이 베이츠는 숨겨둔 무기를 꺼내들고 용병[* 용병들은 베이츠 공작의 가족들이었다.]들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필사의 강습을 감행''', 외자의 난을 진압했다고 한다. 패디 로이 베이츠 공작은 이 무력탈취 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 중 시랜드 공국 국적 소유자[* 시랜드 공국은 초소형국민체이기에, 시랜드 공국과 기성 국가의 이중국적을 허용하기에 이중국적자들이 있었다.]는 '''반역죄'''로, 그리고 시랜드 공국의 국적이 없는 사람들은 '''전쟁포로'''로 규정하고 감금해 버렸는데, 이에 따라 네덜란드와 서독 정부가 이들을 석방시키려고 영국 주재 시랜드 대사관[* 실상은 패디 로이 베이츠의 자택.]을 찾아와 진땀을 뺐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마이크로네이션은 인정받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나라의 형태를 띄고 있기에 이런 상황이 터지기라도 했다면 어느 정도는 외교적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시랜드처럼 '''기초적이지만 나름대로 군사력을 갖고 있다면'''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패디 로이 베이츠 공작은 석방의 교환 조건으로 양국 정부에 시랜드 공국의 국가 인정을 요구했었으나 어쩐지 일이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석방 이후 외자의 난 가담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현재까지도 시랜드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시랜드 공국을 공화국으로 주장하며 '시랜드 공화국 망명정부'를 운영하고 있다.[* [[http://freesealand.homestead.com|시랜드 공화국 망명정부 홈페이지]].] 망명정부가 내세우는 시랜드의 개발 계획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수리하고 새로 칠하기, 영국과의 협의에 따른 어업 및 수상/공중 항로 개척 등이 있다. 1997년에는 1975년 이래 22년간 발행해 온 대량의 여권이 마약 등 범죄 등에 악용되는 것이 문제가 되어 이를 말소시키기도 했다. 그 양은 무려 15만 권[* [[https://www.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216&qna_seq=151213|여권의 단위에 대하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대량의 여권을 말소한것이 신의 한수가 되었다.[* 거의 테러리스트들은 나우루는 물론 초소형 국가여권 이용해서 검문을 통과하고 테러를 저지른다. 말소하지 않았다면 분노한 미국에게 단단히 테러지원국으로 찍혔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초소형 국가라 해도 테러 관련해선 절대로 봐주지 않는다.] [youtube(9zF5Es7OV0o)] 1983년 1월 18일 방영된 영국 방송의 시랜드 르포. 로이 공 부부와 마이클 당시 세자의 인터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